찰스 디킨스 고딕 소설 단편선
고단한 삶에 공명하는 휴머니즘과 날카로운 풍자로 벼른 사회 비판. 19세기 당대 최고의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다. 그런데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가 유령 이야기에도 일가견이 있다. 디킨스의 유령들은 작가가 사회비판과 휴머니즘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고딕 요소들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를 증언한다. 찰스 디킨스의 단편 5편을 수록한다.
「살인자 선장 Captain Murderer」(1860)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은 수많은 작가들이 재생산해내고 있는 전설의 캐릭터. 「살인자 선장」은 디킨스 버전의 푸른 수염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픽윅, 스크루지 등 디킨스의 유명 캐릭터 목록에 추가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
이 살인자 선장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내 죽이기와 엽기적인 파이 만들기는 늘 성공한다. 쌍둥이 자매를 만나기전까지는.
「살인범 재판 ; 에누리해서 들으시라 The Trial for Murder; To Be Taken with a Grain of Salt」(1865)
은행에서 일하는 일인칭화자는 번아웃을 겪고 잠시 쉬는 중이다. 그런데 배심원으로 선정되었으니 출석하는 소환장을 받는다. 무슨 재판인지도 모르고 일단 기분전환 겸 법정으로 향하는데, 알고 보니 세간의 이목을 끈 살인범 재판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피고인이 눈에 익다. 이것은 배심원 소환 전후로 화자가 경험한 초자연 현상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얼마 전 거리를 걸어가는 두 명의 행인이 기묘한 움직임으로 화자의 뇌리에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살인범이었던 것. 그리고 또 다른 행인이 목숨을 잃은 피해자. 이 피해자의 유령도 법정에 출석한다. 이제부터 화자의 눈에만 보이는 이 피해자 유령이 어떻게 재판 과정에 관여하는지 그 활약상이 펼쳐지는데…… 디킨스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법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운가보다. 때론 유령이 나서야 할 정도로.
「어머니의 눈 ; 찰스2세 시대 어느 감옥에서 발견된 자백서 The Mother’s Eyes; A Confession Found in a Prison in the Time of Charles the Second」(1840)
사형수(일인칭화자)가 다음날 처형을 앞두고 감방에서 써내려가는 범죄에 관한 자백. 전직 군인인 화자는 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녔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화자의 내면에 깃든 질투와 분노를 간파하고 있는 사람, 형의 아내다. 화자를 속속들이 아는 듯한 형수의 눈빛, 서늘하고 괴롭다. 그런데 형수가 죽고 형까지 불치병으로 죽는다.
동생 부부는 형의 유언대로 어린 조카를 맡아 키운다. 문제는 이 조카의 눈이 형수의 눈, 그 불신과 의심의 눈을 꼭 빼닮았다. 화자는 어떻게 조카를 죽였는지, 어떻게 그 완벽한 범죄가 탄로가 났는지를 털어놓는다. 다만 형 부부의 죽음을 포함해서 정말 다 털어놓았는지는 의문이다.
「신호원; 철도 1호선 지선 The Signalman; No 1 Branch Line」(1866)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단편 중 하나. 철도 터널이 지나는 고립되고 폐쇄된 공간. 이곳의 작은 신호소에서 선로 문제와 철도 운행의 이상 유무를 파악하고 알리는 신호원의 이야기다.
어딘지 쓸쓸하고 음울한 이 신호소를 내려다보던 화자는 신호원을 발견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 그 깊숙한 곳까지 내려간다. 신호원은 보기보다 지적이고 자신의 일에 성실한 직장인. 다만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도 꿈도 잃은 무기력한 모습.
그런데 이 신호원이 화자에게 개인적인 고충을 토로하는데, 문제는 유령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유령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사고가 일어난다. 유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재난을 막을 수 없는 신호원의 무력감과 절망감. 그토록 전전긍긍하고 괴로워하던 유령의 세 번째 경고, 그것은 뜻밖에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자신의 운명이다. 모호함이 드리운 사늘한 여운.
「신혼방의 유령 ; 교수형당한 남자의 신부 The Ghost in the Bride's Chamber ; The Hanged Man's Bride」(1857)
굿차일드와 아이들러는 고색이 짙은 어느 호텔에 묵는다. 매혹적이면서 으스스한 분위기, 그런데 정체 모를 노인이 나타난다. 언뜻 여기까지는 어딘지 유머러스한 유령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 이야기는 꽤나 음산한 범죄에 관한 것으로 전환된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 10년이 넘게 차근차근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범죄를 계획한 남자. 160여 년 전에 이 남자가 저지른 범죄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살인이다. 그러나 이 살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불길한 공포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오래되고 음울한 저택의 폐쇄된 공간, 베일에 가려진 과거, 억압받는 인물(여성) 여기에 효과적으로 가미된 초자연 요소까지 고딕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