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사님. 설정집
#판타지물, 서양풍, 첫사랑, 비밀연애, 운명적사랑, 능력남, 다정남, 상처남, 순정남, 능력녀, 후회녀, 상처녀, 순정녀, 잔잔물, 애잔물, 이야기중심
“나는 라르노르에게 ‘바깥’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줄게요. 대신.”
“대신?”
“어제처럼 밤에 잠시 당신의 방에 머물게 해줘요.”
완벽해 보이는 삶을 강요받으며 공작가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공녀, 라르노르.
파티가 열리던 날 밤, 자신의 방에 들어간 라르노르는 수수께끼의 남자와 마주친다.
위험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그는 마법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라르노르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바깥 이야기가 궁금한 라르노르는 밤마다 찾아오는 아름다운 신사님을 기다리고,
호기심으로 시작된 인연이 거대한 운명으로 얽히는 잔혹동화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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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의자의 팔걸이만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테이블에 박혀있던 무감한 시선은 시계에 닿았다가, 달이 환한 하늘에 닿았다.
“귀족은 새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했지만, 자유를 앗아갔지. 그러고 나서 의무적인 것들에만 신경을 썼을 뿐, 애정을 주지는 않았으니 새는 당연히 죽을 수밖에.”
죽음을 입에 담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이한 어조였다. 라르노르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어쩌면 그가 말해준 이야기 속의 새를 제 모습으로 덧입혀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리 고민할 건 없어요. 강제로 권하는 것도 아니니.”
어깨를 으쓱거린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라르노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남자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창밖 어딘가를 비추는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돌아갈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남자가 가지러 온 것은 펜던트였고, 자신과는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왜 이토록 아쉬움을 남기는지.
“그럼, 잘 있어요. 아가씨.”
남자는 의자 옆에 세워두었던 케인을 챙겨 뒤를 돌았다. 라르노르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그는 진정 그림 같았다. 이대로 잡지 않으면 놓치고야 말 신기루.
“잠깐. 잠깐만요, 신사님.”
얼굴이 다 화끈해졌다. 라르노르는 자신이 그를 붙잡느라 무심코 덧붙인 호칭에 어물거렸다. 세상에,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신사님’이라니. 아무리 그가 귀족적이고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고는 해도 입 밖으로 내기엔 참으로 낯부끄러운 호칭이었다.
‘낮에 읽은 통속소설이 문제였나?’
그런 책을 읽어서, 그래서 제 머리도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라르노르는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알겠어요. 나는 당신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은신처라고는 한 적이 없는데. 남자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 옷깃을 붙잡은 여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삼켰다. 어젯밤 제 모습이 수상해 보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 제안이 수상했거나. 설마하니 은신처라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라르노르는 답이 없는 남자가 불안했다. 혹시 그동안 마음이 바뀌었다거나, 정말로 농담이었다거나 하는 거라면 어쩌나, 싶었다. 남자와의 거래는 제게 있어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원 모를 남자의 말을 덥석 믿고 그를 방에 들이는 것이다.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순간의 선택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후회하지 말자. 이미 저지른 일이잖아, 라르노르. 자신을 달래는 시간이 그토록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좋아.”
라르노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순간, 제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움에 몸을 움츠렸다.
“이건……?”
라르노르는 어느새 제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를 얼떨떨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그것. 자신이 온종일 붙잡고 고민하던 그것.
자신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남자의 펜던트였다.
깜빡임만 반복하던 은색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달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분명 그늘이 져 있는데, 환히 빛나는 듯했다. 남자는 여태 보지 못했던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일 찾아오겠다는 약속의 증표. 그럼 늦었으니 내일 봐요, 아가씨.”
탁. 창틀과 부딪힌 케인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남자는 창틀에 발을 디디는가 싶더니, 어느새 창가까지 다가온 라르노르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굿나잇.”
사심 없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라르노르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