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짜증 나.”
빨간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가 여의도 증권가에 나타났을 때,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여의도 소재의 어느 건물 입구에 설치된 황소 동상 앞에 멈춰 한참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역동적인 황소. 증권가의 상징. 여자는 비록 동상이나 언제든 달려나갈 기세로 자세를 낮춘 황소의 커다란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많은 사람이 야외에 나와 있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빨간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를 주목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한동안 조용히 황소상을 바라보던 여자는 무언가 다짐한 듯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소를 향해 염료가 든 병을 던졌을 때,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콘크리트 빌딩 숲을 요란하게 울렸다.
여자는 화가 났다고 했다. 순간적인.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어째서 화가 났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26세의 여자는 미술 교육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또한, 서울시에서 공모한 행정 인턴에 선발되어 2개월간 시청에서 일하며 정책 사업의 홍보 모델로 활동한 경력도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여자는 사회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젊은이일는지 모른다. 이런 여자가 어째서 타인의 사유물에 염료가 든 병을 던졌을까?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여자가 그토록 화가 난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