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마운드 빌더
“러브크래프트 서클”은 H. P.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고분, 마운드 빌더The Mound」(이하 「고분」)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대필작은 물론 크툴루 신화 전체를 통틀어서도 수작으로 꼽힙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질리아 비숍의 의뢰를 받아서 대필한 작품인데요. “인디언 고분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머리 없는 유령이 출몰한다. 종종 이 유령은 여자의 모습을 띤다.” 비숍은 이렇게 간단히 플롯을 구성한 뒤 러브크래프트에게 대필을 맡겼다고 하죠. 이것이 너무 평면적이고 단조롭다고 생각한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크툴루 신화와 공포를 결합하여 중장편으로 완성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에서 이례적으로 외계 문명과 인간 문명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광기의 산맥』에 버금가는 치밀한 묘사뿐 아니라 러브크래프트 자신의 유토피아가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요컨대, 이 작품의 “큰-얀 K'n-yan”은 고도의 기술 문명 덕분에 인간의 생로병사와 빈곤을 극복하고, 소수자의 효율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종교의 역할을 축소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큰-얀의 타락을 지켜보는 화자(자마코나)의 입을 통하여 러브크래프트는 기계 문명이 가져온 표준화되고 틀에 박힌 삶의 규칙성에 대한 무감각과 히스테리를 당대 서구 문명의 단면으로 보고 있는데요.
「고분」은 분량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1930년대 초에 《위어드 테일스》의 거절이 있은 이후 좀처럼 발표 지면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미 대필료를 지불했던 비숍은 당시 자신의 대리인이었던 프랭크 벨넵 롱(Frank Belknap Long)에게 작품 분량을 줄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롱도 축약본이 더 상품성이 있겠다고 판단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장중하고 음울하며 압도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이 작품에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는군요. 결국 수정이 아닌, 몇 장씩 빼는 방법으로 축약한 후에 출간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이 또한 별 수확이 없었다고 하죠. 러브크래프트 사후에 오거스트 덜레스가 수정한 축약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축약본 대신에 원본이 출간된 것은 1989년 러브크래프트 사후 50년이 지나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