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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관념론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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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관념론 철학

저자
탁양현 저
출판사
e퍼플
출판일
2019-08-02
등록일
2020-02-25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20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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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관념철학은 무엇인가




1. 現實世界는 虛像이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현실세계의 주도적 철학사상은 대체로 觀念論이었다. 觀念이란, 想像의 세계를 현실세계인 양 인식하는 태도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관념철학은 해체되었다. 그랬다가 21세기에 이르러 다시 새로운 관념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일명 ‘觀念 image’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到來에 의해 불러일으켜진다.
예컨대, 인터넷, 소셜미디어, 사이버 시공간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세계는 唯物論的 物質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지만, 구성되는 순간 그러한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버린다.
분명 물질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작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지극히 관념적인 虛像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관념의 허상은 결코 實際가 아니며,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나 ‘헤겔’은 세계 철학사상사에서 대표적인 관념론자들이다. 그들은 죄다 자기가 사는 國家 독일을, 최상의 觀念的 理想鄕으로서 정립코자 했다. 그러한 행위는 人之常情이다.
일종의 民族主義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행태가, 21세기에 이르도록 세계 철학사상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주도적 흐름을 좇는다면, 우리 韓民族 역시, 응당 우리가 살아내는 시공간을 최상의 관념적 이상향으로서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역사의 구성은 필수적이다. 비록 李祖時代 이후 별볼일 없는 역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왜곡하거나 외면해서도 안 된다.
‘헤겔’의 표현처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상황에서, 600여 년 가까운 ‘노예의 역사’이지만, 그러한 역사를 赤裸裸하게 是認해야만, 그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법이다.
중국과의 事大主義, 일본과의 植民主義는, 우리의 역사가 ‘노예의 역사’인 대표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를 시인하기는커녕, 외려 프로파간다 삼아 庶民大衆을 ‘개돼지 群衆’으로 몰아가는 기득권 권력집단의 행태는, 그야말로 노예마저도 되지 못하는 人間末種의 作態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항상 그런 인간말종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역사였다. 소를 훔친 놈은 절도범이 되고, 국가를 훔친 놈은 대통령이 되는 식이다. 그러니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나마 다소 나아졌다지만, 결국 인류의 사는 모양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의 唯物論과 觀念論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관념의 허상을 힘겹게 해체한 철학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석한 노릇이지만, 현재에 이르도록 현실세계의 인간존재가 관념적 허상을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방편은 없다.
현실세계의 실제적인 樣相은, 지극히 공포스러운 派瀾苦海이기 십상이다. 이러한 현실을 나약한 인간존재가 극복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첨단기술문명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天災地變에 대해서는 束手無策일 따름이다. 제아무리 지구별의 정복자라며 虛張聲勢를 하더라도, 예컨대 颱風, 地震, 海溢 따위의 災難마저도 이겨내지 못한다.
더욱이 인류가 스스로 惹起하는 戰爭을 비롯한 온갖 위험들 역시, 해결하지 못함은 매한가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현실세계를 벗어나 원하는 理想鄕을 摸索케 된다. 그것이 觀念이나 認識을 통한 想像의 시작이다.
哲學界에서는 관념론이 주된 흐름이므로, 관념이라는 개념을 아주 그럴듯한 것으로 포장한다. 그러면서 지극히 학술적이고 논리적이라며 억지를 부린다.
하지만 결국 관념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현실세계 어디에도 實在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으므로 不在이며 無意味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觀念論的 세계에 현혹된다.
온갖 종교의 관념론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이, 잠시나마 위안을 받으며 의지할 수 있는 세계는,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이 지어내는 세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虛像이며 虛無일 따름이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다양한 哲學者 중에서도 관념론을 떠들어대는 자들은, 대부분 아주 野卑하며 淺薄한 족속들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이제는 관념이라는 낡은 외투를 벗어버릴 때도 되었다.
흔히 관념은 信念에 의한 認識으로써 구성된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眞實이며 實在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자칫 관념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더욱이 旣得權的 권력집단은 그러한 관념을 조작하는 온갖 프로파간다로써 서민대중들을 ‘개돼지 군중’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러니 관념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을 때, 현실세계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理性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 인식에 선험적 형식을 도입하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轉換(Kopernikanische Wendung)’을 시도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認識이 對象의 觀念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진리는, 主體의 判斷形式에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기존의 形而上學을 해체하였다. 형이상학이야말로 인식의 관념이 구성해낸 대표적인 想像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결국 倫理學의 단계에서는, 기존의 형이상학이 구성한 어떤 ‘認識的 觀念’의 思惟方式을 빌어, 定言命令이라는 의무적 도덕률을 闡明한다.
칸트 역시도 기존의 관념적 형이상학이 지니는 盲點을 파악하고서 비판했지만, 결국 관념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이다.
후대의 헤겔 역시, 이러한 칸트를 비판했지만, 헤겔 역시도 그러한 차원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러한 한계는 현대철학의 開祖 ‘니체’에 의해서 해체된다.
‘토머스 쿤’은 科學史의 사례들을 고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쁜 뉴턴’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이러한 통찰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집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예컨대, 현실세계의 善惡, 是非, 美醜 등의 문제는, 好惡의 인식에 의한 관념적 판단이기 십상이며, 어떤 절대적 實體로서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쿤 이후 21세기에 이르도록 이러한 측면은, 여전히 五里霧中의 상황에 있을 따름이다.
‘觀念論(idealism, Idealismus)’은, 實體 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체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정신적으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認識論에서 관념론은,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것을 인식할 가능성에 대한 懷疑로 나타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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