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이광수의 『무명』은 소설적 형식을 빌어 작가 자신의 내면을 극한까지 해부한 텍스트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가장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텍스트의 대상으로 삼아 응시한다. 그러나 이 응시는 단순한 자기 고백이나 반성을 넘어선다. 『무명』의 진정한 의미는 그 응시의 방식에, 그 시선의 구조에 있다 .
주목할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다. '무명(無名)'?이름 없음, 혹은 알려지지 않음. 이 제목은 단순히 작중 인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형식 자체가 지향하는 바를 암시한다. 『무명』은 자신을 지워가는 글쓰기, 주체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다 .
소설은 일견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문인으로서 성공하지 못한 '나'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 아래에는 복잡한 층위의 의미망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나'의 목소리는 단순히 작중 화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열된 주체의 자기 대화이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매개체다 .
『무명』의 핵심은 바로 이 '분열'에 있다. 소설 속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화한다.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분석하고, 때로는 조롱한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는 자기 증언과 자기 부정 사이를 진자운동하며,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한다. 여기서 이광수는 매우 현대적인?아니, 탈(脫)현대적인?주체 인식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