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
부끄럽지 않은 얼굴
사람을 오래 만나나보니 관상쟁이가 되어간다. 맞선을 보고 면접을 하는 일은 결코 공연 한 짓이 아니다. 내 입이 말하기 전에 그 얼굴이 먼저 일러주고 내 귀가 듣기 전에 그 얼굴이 먼저 토로한다.
“나, 그 사람 몰라요. 코빼기도 본 적 없어요.”
“만나야만 아는가요? 글로도 알고 음성으로도 알지요.”
그러나 아니다. 만나야 안다. 그의 안색에, 그의 표정에, 그의 미소에 그가 담겨 있다.
불충실한 내용을 포장하여 꾸며낼지라도, 얼굴은 또 얼굴대로 정직하게 보충해 주니까.
소리를 내지 않고도 희,로,애,락,애,오,욕을 웅변보다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얼굴. 얼굴이 있어서 사람 사는 세상이 어둡지 않다.
처음 만나면 초면이라 하고 잘 아는 사람은 구면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많이 알면 안면(顔面)이 넓다고 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면 낯가죽이 두껍다고도 한다. 무례한 짓을 표정도 바꾸지 않고 하면 안면몰수(顔面沒收)하고 산다고 하고, 둔갑하듯이 변절하면 얼굴을 바꾼다고 한다. 사람은 뒤에 숨어 있고 얼굴이 늘 앞에 나서는 것이다.
이목구비야 정연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에는 인격이라는 향기가 있고, 충직한 표정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안색으로 다가온다. 아무쪼록 얼굴을 구기지 말고 살아가야지. 아무쪼록 내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저지르지 말고 살아가야지, 매일 아침 맑은 물로 씻어서 양심을 더 양심껏 고백해야지, 드맑은 미소로 감싸서 이제는 끝없이 끄덕이면서 끄덕이면서 살아가야지.
- 서문 중에서